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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빈 에디터 = '슬램덩크'는 청춘의 표상(表象)이다. 겨우 만화책 따위에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상찬이라며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 이건 사실이니까. '슬램덩크'는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춘기를 지나온 이들을 언제라도 그때 그 시절로 데려 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생활에 절어 있는 이들에게도 강백호의 무모함이 있고, 서태웅의 재능이 있고, 송태섭의 깡다구가 있고, 정대만의 열정이 있고, 채치수의 열망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러니까 그들도 한 때는 북산고 농구부였고, 전국제패를 꿈꿨다고. 아마도 이들에게는 각자 가슴 속에 새겨 둔 '슬램덩크' 명대사가 있을 것이다. 그건 보고 또 봐서 외운 게 아니라 가슴 속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말들이다. 바로 그 청춘의 '슬램덩크'는 이 말 한 마디로 시작됐다. "농구 좋아하세요?"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의 마음에 다시 한 번 불을 지른다. 물론 이건 2시간이면 끝나버리는 영화 한 편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 작품은 그저 활활 타오르던 치기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확인해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영화 그 이상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가 사실상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슬램덩크' 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노우에 작가는 1990~1996년 '주간 소년 점프' 연재를 마친 후 수십년 간 팬의 후속작 요청은 물론이고 일본 만화계의 협업 제의를 수도 없이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2000년대에 10권 짜리 완전판을 출간한 것, 학교 칠판에 분필로 그린 '그로부터 10일 후'라는 기획을 통해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짧게 전한 것, 그리고 송태섭과 이한나가 등장하는 단편집 '피어스'를 내놓은 게 '슬램덩크' 관련 작업물의 전부였다. 다시 말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슬램덩크' 이야기를 더 적극적으로 풀어낸 사실상 첫 번째 후속작이다. 이 작품은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는 전국대회 산왕전을 중심에 두고 프리퀄과 시퀄을 모두 담는다. 우선 송태섭이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설정이 처음 나오는 '피어스'의 연장선에서 그의 과거를 큰 비중으로 다루고, 그러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송태섭의 이야기를 짧게 그려 그간 북산고 농구부원의 미래를 궁금해한 관객의 기다림을 일정 부분 보상해준다.
송태섭의 전사(前史)를 길게 다루는 한편 원작에선 대사로만 언급된 그와 정대만의 관계나 채치수의 과거를 짧게나마 새롭게 보여주고, 원작 내 최고 실력자로 그려지는 정우성에 관한 에피소드도 있긴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전달하려는 건 역시나 관객이 과거에 '슬램덩크'를 봤을 때 느꼈던 그 뜨거움이다. 어린 송태섭의 이야기가 지나간 뒤 산왕전이 시작될 땐,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또 한 번 반복하는 것에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팬들이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명대사와 명장면이 하나 둘 다시 소환되기 시작하고, 끝내 강백호와 서태웅이 손을 마주치는 그 순간에 도달하면 과정과 결과를 모두 알고 있는 그 이야기에 또 한 번 푹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흥은 각 캐릭터의 움직임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역동적으로 구현한 컴퓨터그래픽(CG)에 더해 감정을 끌어올리는 데 특화된 듯한 연출력을 통해 극대화된다. 특히 강백호의 마지막 득점 장면은 만화 책에서 보여준 대사 없는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영상 매체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긴장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슬램덩크'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존에 '슬램덩크'가 각 캐릭터의 개인사는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철저히 승부와 경쟁이라는 키워드에 맞춰져 있었다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주인공 송태섭의 어린 시절과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곡진히 다루며 인간미를 풍긴다. 그건 아마도 23살이었던 이노우에 작가가 이제는 50대 중반의 나이가 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이노우에 작가는 23~29세에 '슬램덩크'를 연재했다). 실제로 그는 '슬램덩크'에 대해 "주인공은 몸집이 크고 엄청난 능력을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로 했다. 그 이야기에 꽂혔고 '그 소중한 한 시기만을 잘라내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끝냈다"고 했다. 그리고나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관해서는 "아픔을 안고 있거나 극복하는 존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모두 아픔과 함께 살고 있지 않나"라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이번 작품의 주인공이 원작에서 비중이 가장 적고 체격도 가장 작으며 다른 캐릭터와 비교하면 비교적 평범한 재능을 가진 듯한 송태섭인 건 당연해 보인다.
프롤로그가 끝나면, 일본 밴드 더 버스데이(The Birthday)의 노래 '러브 로켓'(LOVE ROCKETS)이 흐르며 북산고 5인방이 차례로 스케치되며 등장한다. '슬램덩크'를 사랑했던 관객이라면, 이미 이 대목에서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그때의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우리는 패기는 있지만 실력은 없고, 재능은 있지만 이기적이고, 실력은 있지만 노력하지 않은 채 시간을 허비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꾸만 움츠려 들고, 자꾸만 상대와 나를 비교하면 열등감을 느끼곤 했다. 일부 관객은 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이 송태섭이어서 아쉬울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작품엔 강백호와 서태웅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건 아마도 의도된 연출이 아닐까. 이노우에 작가는 아직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강백호와 서태웅을 애써 아껴뒀다는 건 언젠가 그들과 함께 관객을 다시 만나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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