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일 방송된
‘꼬꼬무- 기묘한 증발, 그리고 검은 그림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이윤지, 슈퍼주니어 규현, 조정식 아나운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감쪽같이 사라진 동생
때는 1992년 9월 서울, 29살 박영순 씨는 막 해외 출장에서 돌아왔어. 영순 씨는 가족에게 줄 선물을 한아름 챙겨 집으로 갔어. 근데 오랜만에 만난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
“여보, 도련님이 사라졌어요.”
영순 씨의 세 살 아래 남동생이 사라졌다는 거야. 당시 동생은 형 영순 씨의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어. 근데 동생이 며칠째 집에 안 들어왔고, 회사에 전화했더니 일주일째 출근을 안 했대. 이게 영순 씨 동생의 사진이야.
이름은 박태순, 27살. 삼남매 중 막내였어. 태순이는 금속재료를 다듬는 일을 하는 선방공이었어. 엄청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했대. 근데 갑자기 사라진 거야. 가족들은 태순이를 찾아 나섰어.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태순이가 갈만한 곳을 닥치는 대로 찾아 다녔어. 그리고 곧, 태순이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을 찾았어. 직장동료 김 씨였어.
김 씨가 태순이를 마지막으로 본건 8월 29일 토요일이었어. 이때만 해도 주6일 근무라, 토요일에도 회사에 출근해야 했어. 그날 일이 끝나고 다같이 태순이의 환영식을 해줬대. 밤 8시가 넘어 술자리가 끝났고, 두 사람은 같이 1호선 역곡역으로 갔어.
당시 지하철 노선도야. 지금에 비하면 단순하지. 태순이의 직장은 역곡역에 있었고, 집은 석수역이었어. 태순이가 집에 돌아가려면 구로역에서 한번 환승해야 해. 김 씨는 그날 구로역에서 태순이랑 헤어졌고, 그게 김 씨가 본 태순이의 마지막 모습이야.
CCTV도 없던 시절, 가족들은 태순이가 집에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나, 아니면 퍽치기를 당했나,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어. 일단 집 근처 파출소부터 찾아 갔어. 파출소에 가서 혹시 교통사고 난 거 있냐 물었더니 없대. 이어 역무실에 가서 혹시 무슨 사고가 난 게 있냐 했더니 또 없대. 병원도 알아봤는데, 역시 그런 일이 없었대. 말그대로, 태순이는 완전히 증발한 거야.
▲ 9년만에 납골함으로 돌아온 동생
형 영순 씨는 태순이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렸어. 근데 친구들이 깜짝 놀랄 이야기를 했어.
“동생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동생이 제 이름을 가지고 다른 회사에 취업하고 그랬었다고. 한 4~5년 정도를 동생이 제 신분증을 가지고 생활했던 거 같아요.” –형 박영순 씨
그동안 태순이가 형 박영순으로 살았다는 거야. 심지어 사용한 이름이 하나가 아니야. 박영순, 조인수, 박상원 등 동시에 여러 이름을 쓰고 다녔대. 그 뿐만이 아니야. 태순이가 실종 전 친구들한테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는 거야.
사라진 태순이의 흔적은 여기까지였어.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어. 막내 아들이 갑자기 실종됐는데,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혹시 어디 다니다가도 비슷한 애가 있으면 우리 태순이 아닌가 하고…어떨 땐 가다가도 차를 멈추고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아버지 박종건 씨
부모님은 혹시나 해서 태순이 계좌에 돈도 넣어주고, 이사도 안 가셨대. 혹여나 태순이가 돌아올 때 엇갈리면 안되니까.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무려 9년이 지난 2001년. 태순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어. 그런데 돌아온 태순이는,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어.
태순이는 실종된지 9년만에 납골함으로 가족 곁에 돌아왔어.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준 건,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야. 가족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문사위에 진정을 냈었거든. 의문사위는 실종 신고가 된 사람들에 대해 신원 확인 절차에 돌입했고, 그 과정에서 태순이를 찾았어.
도대체 태순이가 왜 죽은 거냐고 물으니, 달리는 기차에 치여서 즉사했대. 그러면서 이걸 보여줬어. 당시 사고 현장에서 찍었다는 사진이야.
이 사람이 태순이래. 전혀 못 알아보겠지? 사인은 두뇌파열. 얼굴은 형체가 아예 없어. 이 사진만 봐서는, 태순이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그런데 지문으로 확인해보니 태순이가 맞대. 사고 직후에 경찰이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어둔 게 있었고, 대조해보니 태순이의 주민등록상 지문과 일치했대.
“살아 있을 거라 믿고 있었는데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니까… 부모님은 저보다 더 놀라셨어요. 동생 유골함 보면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어요. 어머니는 며칠 누워 계셨어요. 조그마한 희망조차 사라지니까, 맥이 탁 풀리는 거죠.” –형 박영순 씨
그저 살아 돌아오기만 바랐던 태순이의 죽음에 가족도, 친구들도 슬픔에 빠졌어. 근데 그 슬픔은 의문으로 이어졌어. 태순이의 죽음에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거든.
▲ 물음표만 가득한 태순의 죽음
물음표 하나, 태순은 왜 사고직후 발견되지 않았나?
기차 사고는 태순이 실종된 그날 밤 9시 55분에 일어났어. 회식을 마치고 전철을 탄 그 이후야. 태순이가 실종되고 나서 가족들이 경찰서, 역무실, 병원 다 뒤지고 다녔잖아? 열차 사고가 났으면 당연히 사고가 접수됐을 텐데. 왜 태순이의 사고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물음표 둘, 태순은 왜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나?
태순이의 집은 석수역인데, 사고는 그보다 한 정거장 전인 시흥역에서 일어났어. 태순이가 전철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렸다는 이야기야. 태순이는 왜 집까지 안 오고, 거기서 내렸을까?
물음표 셋, 전철을 탔는데 사고는 왜 기차 승강장에서 났나?
사고 지점도 이상해. 태순이는 당시 전철을 탔어. 시흥역은 기차와 전철이 모두 통과하는 곳인데, 선로는 각각 따로 있어. 그런데 태순이 사고 지점은 전철이 아닌 기차 승강장 쪽이었어. 태순이는 그날 밤 왜 전철에서 내려 기차 승강장 쪽으로 간 걸까?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한 걸까? 가족과 친구들은 태순이가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입을 모았어. 유서도 없었고, 그럴만한 징후도 전혀 없었다며.
물음표 넷, 사라진 부기관사
이 사고를 직접 봤다는 유일한 목격자가 있어. 바로 사고 기차의 기관사야. 기관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고는 순식간이었대. 기차 정면에 비틀거리는 사람이 보여 급제동하고 기적을 울렸는데도, 그 사람이 순식간에 선로에 들어와서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어. 그렇게 이 사고는 ‘신원불상의 남자가 철로를 무단횡단 하다가 그대로 치여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어.
그런데 당시 기관실에는 기관사만 있는 게 아니었어. 기차 운행은 보통 기관사와 부기관사가 2인 1조로 함께 짝을 이뤄 투입돼. 사고 기차는 광주행 하행선 무궁화 열차였어. 그 방향을 생각하면, 태순이는 기차의 왼쪽에 부딪혔을 거야. 그럼 오른쪽에 탑승하는 기관사보다, 왼쪽에 있는 부기관사가 사고를 더 명확하게 봤을 거야.
기관사에게 그날 함께 한 부기관사가 누군지 물었어. 그런데 모른대. 주말운행이여서 평소 같이 다니던 짝이 아니었대. 같이 일한 동료가 누군지 모른다니, 황당한 답변이지. 의문사위에서 사고 당일 운행 일지를 찾았어. 근데 세월이 지나 폐기했대. 그 이후에도 부기관사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못 찾았어.
물음표 다섯, 사라진 크로스백
여러 의문들 중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가장 이상하게 여기는 부분은, 태순이의 소지품이 없어졌다는 거야. 당시 태순이는 신분증, 집열쇠 등을 넣기 위해 검정 크로스백을 분신처럼 메고 다녔대. 그런데 사망 후 발견된 유일한 소지품은 호주머니에서 나온 전철 정액권 한 장이었어. 갖고 다니던 지갑조차 없었어. 유실물 센터에서도 습득된 물건이 없다고 했어.
물음표 여섯, 9년 전에는 확인되지 않은 지문
변사자의 신분이 태순이라는 걸 지문 조회로 알았잖아? 의문사위에서 지문 신원조회를 의뢰했더니 하루만에 결과가 나왔대. 이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걸, 어떻게 그동안 확인하지 못했을까. 황당한 건, 9년 전에도 신원 조회를 했었는데 그땐 신원을 못 밝혔다는 거야. 같은 지문인데, 9년 전에는 식별이 불가능했고, 지금은 식별이 가능하다? 너무 이상하지.
▲ 박태순의 정체
친구들에 따르면, 태순이는 실종 1주일 전에 미행이 붙어 약속에 늦은 적이 있대. 태순이는 수시로 미행을 당하고 있었어. 대체 누가, 왜?
태순이가 금속재료를 다듬는 일을 했다고 했지? 그런데 태순이는 처음부터 공장 노동자는 아니었어. 한신대학교 철학과 85학번, 이른바 운동권 대학생이었어. 대학에 입학한 후 ‘F1’이라는 서클에 가입했는데, 학교 내에서 비밀리에 시위를 주도하던 언더서클이었대.
이 서클이 특히 잘하는 건, ‘사문서 위조’였어. 이건 태순이가 위조한 이력서야.
이름이 형 박영순으로 되어있고, 나이, 학력을 싹 바꿨지. 태순이는 왜 본인이 아닌 형의 이름으로 거짓 이력서를 만들었을까? 그건 태순이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어. 친구들도 본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이력서를 만들어 취업에 이용했어. 그들이 이렇게 행동한 건, 이 사람의 영향이야.
열악한 노동 현실을 바꾸려 애쓰면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결국 분신 항거로 생을 마감한 전태일 열사야. 전태일은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와 한자로 된 근로기준법 책을 읽을 수가 없었대. 그래서 ‘나한테도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대. 그가 남긴 이 말에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어. 너도나도 “태일이의 대학생 친구가 되겠다”며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한 거야.
학생 출신 노동자는 ‘학출’이라 불렸어. 학출들은 공장에 취직해 노조도 설립하고, 학교를 못 다닌 동료들을 위해 야학도 열었어. 그 중심에 태순이가 있었던 거야. 태순이는 진심으로 노동운동에 나섰어. 학교도 자퇴했고, 가족들이 말려도 “목표하는 게 있으니까 이 길로 가겠다”며 자신을 이해해달라 했대.
“태순이가 손이 조그맣고 참 고왔어요. 다른 노동자들 손하고 본인 손하고 너무 비교가 되니까, 그걸 참 고민했었어요. 그래서 일도 장갑 안 끼고 그냥 함부로 하고. 손이 거칠어지게. 그랬던 기억이 나요.” -친구 이창연 씨
당시 학출은 빨갱이, 불순세력으로 불렸어. 노동운동자는 빨갱이로 낙인 찍던 시대야. 이력서에 대학생이라 쓰여 있으면 바로 탈락이야. 그래서 신분 세탁은 필수야. 일부러 학력을 낮춰 적었어. 당시 이런 위장취업은 운동권의 핫 트렌드였대. 1985년에서 87년까지, 3년동안 위장취업으로 해고된 학출이 624명이었대. 걸린 게 이 정도면, 안 들킨 건 더 많겠지. 학출들 중에는 심상정, 원희룡, 김문수, 송영길, 손학규 등 유명 정치인이 많아. 이 사람들처럼 태순이도 위장 취업자였던 거야.
당연히 위장 취업은 불법이지. 그래서 결국 태순이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들어가 징역을 살고 나왔어. 그때가 실종 2년 전이야.
▲ 박태순을 따라다닌 검은 양복의 남자들
태순이는 출소하자마자 또 공장에 들어갔어. 이러니 수사 기관에서 어떻게 봤겠어. 요주의 인물인 거야.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한 건 출소 직후 부터였어. 태순이와 친구들이 어딜 가든 누군가의 미행이 붙은 게 느껴졌어.
한 번은 친구들끼리 MT를 간 적이 있는데, 경찰이 다가와서 불심검문을 한다며 신분증을 요구했대. 그 때 경찰 옆에 있던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어느 회사에 다니냐고 물어 친구들은 별 의심 없이 이름과 직장을 알려줬대. 그리고 그들은 태순이 일행을 밤새 감시하고 몰래 촬영까지 했어.
MT를 다녀온 후, 친구들은 직장에 위장취업한 사실이 발각됐어. 그리고 이들에게 이름을 빌려준 친구들 집으로도 확인 전화가 걸려왔어. 신원이 다 들통 난 거야.
태순이 후배 철우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자신을 쫓아오길래 도망쳤다가 잡히기도 했어. 그들은 철우에게 “박태순 어딨어!”라며 행방을 물었어.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태순이를 찾고 있던 거야.
검은 양복들은 철우를 경찰서에 인계하고 사라졌어. 그 때 철우를 인계 받은 형사라면, 그 검은 양복의 정체를 알지 않을까? 그래서 의문사위에서는 그 백철우 사건을 처리했던 합천 경찰서를 찾아가 담당 형사를 만났어. 형사가 수첩을 뒤적이더니, 그 검은 양복에 대한 단서를 알려줬어.
“군 수사관 상사 장ㅇㅇ”
“군 수사관 6급 이ㅇㅇ”
검은 양복 남자들의 정체는 기무사, 군대 내 정보기관인 국군기무사령부 소속 군인들이었어. 태순이는 민간인인데 왜 기무사에서 쫓고 있었을까? 바로 ‘마파람 계획’ 때문이었어.
마파람, 순우리말로 남풍을 뜻하지. 군대 내에 있는 좌익 세력을 관리하겠다는 계획이야. 운동권 학생들도 때가 되면 군대에 가잖아. 그럼 이 학생들을 A, B, C 등급을 매겨 문제사병으로 관리를 하는 거야. 태순이는 민간인인데 왜 ‘마파람 계획’의 대상이 됐을까? 친구 때문이었어.
먼저 군대에 간 창연이로 인해, 태순이도 민간인 사찰을 당하고 있었어. 창연이는 마파람 A급이었어. 전담팀이 따로 있을 정도로. 그게 바로 검은 양복, 수사관 장 씨와 이 씨였어.
“방위 근무를 하다가 퇴근하려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면, 옷이나 지갑이 흐트러져 있다는 걸 수시로 느꼈어요. 누가 건드렸네 했죠. (9년 뒤) 의문사위 실지조사에 나갔는데, 기무사 요원이 저한테 개인적으로 툭 치면서 ‘1년 반 동안 비싼 경호원 대동했다고 생각해’ 그러더라고요. 그 얘길 듣는데 얼마나 소름이 끼치던지…” –친구 이창연 씨
이 검은 양복들은 창연이 뿐만 아니라 창연이가 만나는 모두를 감시했어. 이들은 감시 대상의 집에 몰래 침입해 뒤지기도 했어. 검은 양복 장 씨가 직접 그린 내사 체계도를 보면, 맨 위에 ‘용의자 이창연’, 그 밑에 백철우, 박태순 등의 친구들 이름이 적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어.
▲ 엇갈린 증언, 끝내 밝히지 못한 진실
태순이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의문점들. 이 의문점들이 모두 우연의 일치일까? 이걸 한 번 봐바.
우수열, 문승필, 우종원. 이 대학생들은 모두 기차에 치여 사망했고, 사건은 자살로 내사 종결됐어. 공교롭게도 이 세명 모두 운동권 학생이었대. 태순이의 죽음도 이와 연관이 있는 걸까? 진실은 이 사건의 키를 쥔 사람이 알고 있겠지. 바로 기무사 수사관, 검은 양복의 장 씨.
의문사위는 기무사 장 씨와 대면 조사를 실시했어. 의문사위 조사관이 박태순을 미행했냐고 묻자 장 씨는 “왜 내가 미행합니까. 단서가 있습니까?”라며 방어적으로 대답하거나 답변을 거부했어. 어떤 미행이나 감시도 없었다고 주장한 거야.
근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제보자가 나타났어. 장 씨와 같이 활동했던, 동료 기무사 이 씨였어. 이 씨는 당시 퇴직하고 민간인 신분이었어. 그런데 이 씨가 어떤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아주 결정적인 진술을 해줬어.
“장ㅇㅇ이 1992년 9월경, 좌경계 사무실을 방문해 저에게 인사말을 건네면서 ‘휴가 나와서 들렀다’라고 하면서 이야기 도중에 ‘전에 우리가 동향 내사하였던 박태순이 전철역에서 죽었다’라고 하여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하였더니, ‘수원지역의 경찰들을 만나고 올라왔는데 경찰들 이야기가 박태순이 죽었다’라고 하더라며 작은 목소리로 웃음을 띠면서 이야기했다.” –기무사 이 씨의 진술 中
태순이가 죽은 걸 1992년 9월에 장 씨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 태순이가 실종되고 한달도 안 된 시점이야. 그때는 가족들이 실종된 태순이를 찾아 헤맬 때야. 그런데 태순이가 죽은 걸 장 씨와 경찰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술이었어.
장 씨는 이 씨의 진술이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어. 한 명은 분명히 들었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 진술이 엇갈려. 결국 의문사위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제안했고, 장 씨와 이 씨 모두 기꺼이 하겠다고 수락했어. 그런데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하기 직전, 두 사람 모두 입장을 번복하고 조사를 거부했어.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장씨는 끝까지 박태순 미행과 감시에 대해 부인했어.
의문사위는 기록을 통해서라도 단서를 찾으려고 기무사, 경찰, 법무부에 박태순 내사 기록 열람을 요청했어. 하지만 경찰청은 기록이 없다고, 법무부는 대외비라서 협조할 수 없다고, 기무사는 자료를 폐기했다고 했어. 결국 첫번째 의문사위 조사에서는, ‘진상규명 불능’이란 결과가 나왔어.
“상식에 비춰볼 때 상당한 의문이 남는 지점이 있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공작했던 사건 기록, 내사였든 사건화했던 기록이든, 그 기록에 접근할 수만 있었어도 좀 더 진상 규명에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당시 의문사위 조사관 정상영 씨
박태순 의문사 사건은 2003년 2기 의문사위가 했던 1년간의 두번째 조사에서도 ‘불능’, 2005년 진화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 4년 7개월간의 세번째 조사마저도 ‘불능’이 나왔어.
▲ 진실 규명을 위한 끝나지 않은 싸움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태순이는 가족과 친구들 곁으로 돌아와서 마석 모란공원에 묻혀졌어. 거기에는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전태일 열사가 묻혀있어. 태순이는 그 곁에 묻힌 거야.
부모님은 9년만에 돌아온 아들을 자주 보러 가셨어.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겠지. 유족 입장에선 사인이라도 밝히고 싶을 텐데, 그 한이 얼마나 클까. 3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는 9년 전에 막내 아들 태순이 곁으로 가셨어. 아흔을 앞둔 어머니는 기력이 많이 쇠하신 상태야.
형 영순 씨와 태순의 친구들은 지난해 3월, 또 한번 진상규명을 요청했어. 이번이 네번째야. 이들이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태순이가 떠난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가고 있어.
“좋은 친구였고 훌륭한 친구였기 때문에, 내가 그럼 뭐라도 그 길에 뭔가를 더 해야한다. 태순아 내가… 조금이라도 어쨌든 열심히 해 볼게. 네가 어쨌든 내 안에 살고 있다.” -친구 정훈록 씨
“저도 속상하게 생각하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제가 너무 불철저하게 생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벌써 태순이가 죽은 지 올해가 30년째인데, 30년동안 어깨에서 떠나질 않아요. 무거워요.” -친구 이창연 씨
“도움이 될 만한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동생한테 특별하게 뭔가 해준 게 없는 거 같아요. 제가 뭐 해준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아서… 미안하죠 가슴 속엔 항상. 사고가 왜 났는지, 어떤 이유에서 그 일이 벌어졌는지 그런 사실들은 저희가 알아야 하지 않나.” –형 박영순 씨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박태순 의문사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했어. 이번엔, 가족과 친구들에게 새겨진 물음표가 마침표가 될 수 있을까.
이건 태순이가 공장에 다닐 때 쓴 시야.
제목
전태일과 박영진과 문송면이 강민호가 있는 곳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이 있는 곳
거기에 묻혀질라고 두런거려 본다
비가 우둑거리면
받쳐 든 우산이
그 우산에 가려진 얼굴들에 그늘이 드려지겠지
하다못해 꽃 한 송이 조금 들고 울어줄 친구라도
다른 동지들을 찾기 위해 왔다 들려줄 것이다
…
-1991년 6월
노동운동 동지들이 묻혀 있는 모란공원에 대한 시야. 태순이는 운명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 곳에 함께 묻혔어.
‘꼬꼬무’ 인터뷰에 응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우리 태순이 일이라면”이라며 기꺼이 나서줬어. 그만큼 태순이가 좋은 사람이었단 거겠지. 박태순 의문사 사건,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지길.
사실 박태순 의문사 사건 말고도 풀리지 않은 사건이 너무 많아. 지금 현재 조사하고 있는 것만 8500여건이라고 해. 이 모든 물음표들이 해결되는 그날까지, 끝까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하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정은지 에디터
(연예뉴스 정은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