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지 말아야 할 오월, 그날의 광주.
1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나를 잊지 말아요 – 오월이 오면’이라는 부제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조명했다.
1980년 5월 19일, 평범한 주부인 길자 씨는 고등학교 1학년 아들 재학이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 집인데 무서워서 집에 못 가겠다며 데리러 와달라는 것.
이에 길자 씨는 버선발로 아들을 데리러 갔고, 거리에서 길자 씨는 총을 든 군인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살기가 느껴지는 군인들을 피해 아들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군인들에 의해 29세 청년 김경철 씨가 사망했다는 것. 특히 그는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직장 동료들과 식사를 하러 가는 길 다짜고짜 군인들에게 두드려 맞았던 경철 씨. 하지만 그는 청각 장애자로 그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경철 씨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은 더 많았다.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나라 국민들을 백주 대낮에 대로변에서 무차별한 폭행을 했다는 것. 그리고 당시 이를 목격한 이는 이를 ‘인간사냥’이라 불렀다. 이 사건은 바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8 몇 개월 전 10.6 사태가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군인들이 국가를 통제했다. 그리고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12.12사태가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그 중심에 대학가가 있었고 대학 가는 전두환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외쳤다.
하지만 신군부는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했다. 이에 최전방으로 향해야 할 군부대는 상당수 대학가로 향했고, 모든 국민들의 정치 활동을 중지시켰다.
결국 시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광주만은 그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에 5월 18일 공수부대가 광주로 배치되어 시위를 진압했다. 이들의 시위에 피범벅이 된 사상자가 속출됐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에 광주의 시민들은 더욱 거세게 반발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대의 시위는 거세지만 언론까지 탄압해 광주는 더욱더 고립이 되어 갔다. 그러는 중에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혈투가 벌어졌고, 5월 21일 계엄군들은 수백 발의 총알로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계엄군들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단순한 행인들에게까지 총을 발포했다. 이날 사망한 사망자만 최소 50명.
대체 계엄군은 왜 그랬던 걸까. 당시 공수부대원이었던 최병문 씨. 그는 당시에 대해 “지금은 옛날에 우리가 정말 심했구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구나 하지 당시에는 몰랐다”라며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밝혔다. 그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에 대해 “광주 폭동이라고 했다. 빨갱이와 다 똑같은 폭도로 인식하고 있었다”라며 “쟤들은 폭도다 때려도 된다라는 생각이었고 그게 옳은 길인 줄 알았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광주 투입 석 달 전 공수부대에서는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상부에서 부대원들에게 시위대는 빨갱이이자 적이라고 주입시켰고, 이른바 충정훈련이라는 시위 진압 훈련도 따로 실시했다. 충정훈련이란 진압봉으로 사람을 때리는 훈련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한 방에 제압하는지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이러한 참상을 만든 것은 전두환과 신군부. 그러나 정작 싸우는 것은 시민과 군인이었다. 애먼 청년들끼리 서로 피를 보고 있었던 것.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시민들은 광주를 시키기 위해 무력으로 저항했다. 시민들은 시민군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고 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부상자들을 위해 너도나도 병원을 찾아 헌혈을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던 것.
사라진 오빠를 찾기 위해 버스에 올랐던 금숙 씨는 계엄군의 공격을 받았다. 계엄군이 버스를 향해 무차별 난사를 했던 것이다. 당시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중 금숙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금숙 씨는 혼자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계엄군 투입 9일째, 계엄군은 탱크까지 동원한 최후의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이에 시민군은 대표를 만들어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다. 시민들이 내건 조건은 병력 철수, 폭력 진압 사과, 시민 석방이었다.
이에 계엄군은 마지막 경고이니 무기를 버리고 모두 해산하라며 그 어떤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민군들은 도청에 남아 마지막을 대비했다. 그리고 시민군 지도부는 어린 후배들에게 “너희라도 꼭 살아남아서 이 일을 기억하고 증언해라”라고 부탁했다. 이에 그중 일부는 떠밀리듯 도청을 나왔고 일부는 남았다. 그렇게 남은 최후 결사대 200명은 각자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새벽 3시 50분 도청 옥상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한 시민은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다. 모두 도청으로 나오셔서 시민 학생들을 살려달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이다. 우리 형제, 자매들을 잊지 말아 달라”라고 간절히 외쳤다.
새벽 4시 도청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일방적인 계엄군의 공격이 1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이에 시민들은 하나 둘 쓰러져갔다. 그 속에 재학이도 있었다.
16살의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꿈에서라도 아들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단 한 번도 꿈에서도 만나지 못한다며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시민군 17명이 사망했고 100여 명이 체포됐다. 그리고 다음날 계엄군은 도청 진압을 자축했고 작전 수행 중 사망한 이는 한 명도 없다는 뻔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계엄군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신군부의 수뇌부만이 크게 기뻐했고 그 중심에는 전두환이 있었다.
신군부는 정적 김대중에게 내란 음모 혐의를 씌웠다. 북괴의 사주를 받아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마침대 1980년 9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국민들 대부분은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믿고 있었던 것. 언론에서 5.18은 금기어가 되어 버렸고, 언급 시에는 유언비어 유포죄로 검거됐다.
광주 내에서는 더했다. 추도식을 위해 유족이나 피해자들이 모일 수도 없었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감시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 1987년 여름 독일에서 외교 행낭이 하나 도착했다. 장용주 신부님은 자신이 보고 듣고 아는 진실을 기피해선 안 된다며 그것을 알리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의 생생한 기록이 담긴 외신 보도 영상을 장용주 신부님이 독일에 있을 때 직접 구해 7년이 걸려 우리나라로 들여온 것. 다행히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무사히 반입에 성공했고 신부님은 지하 골방에서 2일 동안 천 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 전국의 성당으로 보냈다.
그렇게 광주의 참상은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고, 국회에서까지 상영됐다. 그리고 1988년 청문회가 여렸다. 신군부 수뇌부가 참석한 청문회에서 이들은 변명과 모르쇠로 일관했다. 발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령한 이는 없고 군인들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유 발포였으므로 정당방위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말했고,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 발뺌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5.18 특별법이 제정됐고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결과는 전두환 사형.
그러나 수감 2년 만에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특별 사면됐다. 그리고 2021년 사망 전까지 사죄와 속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유족들은 끝까지 사죄도 없이 죽어버린 전두환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무고한 시민 274명이 사망했고 3,700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계엄군은 23명이 사망했고 115명이 다쳤다. 또한 당시 신고된 행방불명자만 400명이 넘는다. 그중 공식 인정된 피해자는 단 78명. 나머지 실종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소문만 무성한 상태이다.
그리고 40년이 지나도록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나지 않고 있다. 이에 재학 군의 어머니는 끝까지 5.18을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또한 방송 말미에는 지금이라도 실종자들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용기 있는 고백을 해달라고 부탁해 눈길을 끌었다.
(연예뉴스 정은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