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속 연극 ‘바냐 아저씨’ 中-
‘살다’는 말이 이렇게 아름답고, 강력한 말이었던가. 활자에 지나지 않았던 동사가 생명을 얻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사키(미우라 토코)의 상처 깊은 삶을 들여다본 후 만난 이 대사는 강렬한 울림이 돼 극중극의 대미와 영화의 대미를 장식했다.
단호하다 못해 결기에 찬 언어는 말(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을 투영한 손짓이며 몸짓이었다. 영화 속 연극 무대에 오른 박유림은 유나이자 소냐로서 바냐 아저씨에게, 가후쿠에게, 미사키에게 ‘우리 살도록 해요’라는 메시지를 수어(手語)로 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어를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이해나 해석의 언어가 아니었다. 교감을 부르는 손짓이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분명 위로받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연출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죽은 아내에 대한 상처를 지닌 연출가 겸 배우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그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와 만나 삶을 회복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지난해 칸영화제에 각본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수상 릴레이를 이어간 영화는 지난 3월 열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외국어영화상)까지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일본 감독이 만들고, 일본 배우가 주연한 이 영화에는 한국 배우 박유림, 진대연, 안휘태도 출연했다. 단연 눈에 띄는 배우는 영화 중반부터 등장해 수어 연기로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한 박유림이다. 박유림은 수어 연기를 하는 배우 ‘유나’로 출연해 영화 속 연극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를 연기하기도 했다.
영화 속 이미지와 연기가 박유림에 대해 가진 데이터의 전부였기에 어떤 배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터뷰룸에 들어선 박유림은 밝고 명랑한 에너지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또한 연기에 대한 열정과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한 뜨거운 배우이기도 했다.
◆ “3년간 끝없는 오디션 도전 끝에 만난 ‘드마카'”…끈기와 열정으로
박유림,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게 없는 배우다. 10대 후반까지 꿈이 없었다는 이 배우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을 즐겼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저 세계란 어떤 세계일까’
이 호기심이 박유림을 영화라는 세계 속에 발 딛게 했다. 그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배우니까 연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배우고 싶고, 배우다 보니 연기가 재밌더라고요.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된거예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 의해 발견됐지만 이 신예는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쳤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배우의 꿈을 위해 수년간 도전했다. 여느 신인처럼 오디션의 문을 숱하게 두드렸지만, 다소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외모와 드러나지 않은 매력으로 인해 많은 기회를 부여받지는 못했다.
“오디션 횟수라는 게 상대적인 거지만 저 역시 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했어요. 2017년부터 오디션을 보기 시작해서 2020년 이 영화를 만나기까지 3년간 떨어지기만 했던 것 같아요. 지금 넷플릭스에 나오는 웬만한 드라마의 오디션도 다 봤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동안 수없이 거절당했지만 괜찮아요. 이 영화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치열하게 도전하고, 결과에 순응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 시간들은 떠올린 박유림은 “초반에는 ‘언젠간 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마음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포기하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하는 건데 제게 그럴 용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는데 주변에서 응원을 많이 해줬어요. 뭘 보여준 것도 없는데 가족, 친구들은 ‘할 수 있어’, ‘될거야’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줬어요. 힘이 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자신을 ‘고집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터무니없이 고집을 부리진 않아요. 제가 정말 원하고 확신하는 것에만 고집을 부려요. ‘이게 하고 싶다’, ‘이건 틀리지 않아’라는 확신이 있으면 주변의 말도 듣지 않고 밀어붙이고, 제가 확신이 없으면 주변의 말도 많이 경청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 “줌으로 봤던 오디션, 하마구치 사진 붙여놨던 이유는…”
박유림은 ‘유나’ 역을 따내기 위해 총 세 차례의 오디션을 봤다. 1차는 온라인 화상 오디션, 2차는 대면 오디션, 최종 오디션은 파트너였던 진대연과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추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1차 오디션의 경우, 감독과 눈을 마주치며 연기하는 게 아닌 아닌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며 치르는 오디션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박유림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의 내적 친밀감을 쌓기 위해 그의 사진을 방에 붙여 놓고 연습했다고 말했다.
“2020년 2월쯤 1차 오디션을 봤던 것 같아요. 유나가 ‘바냐 아저씨’ 오디션을 보는 장면의 대본을 주시며 대사를 읽어봐 달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수어가 아닌 말로 연기를 했어요. 그리고 감독님과 긴 대화를 나눴어요. 작품에 대한 제 생각을 친한 사람과 수다 떨듯이 전했어요. 또 제가 살아온 삶에 대한 긴 이야기도 나눴고요. 느낌이 좋았어요. 1차를 보고 난 후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
2차는 하마구치 감독이 한국으로 넘어와 대면 오디션이 이뤄졌다. 박유림은 “하마구치 감독을 실제로 보니 떨리면서도 좋았어요. 그때는 전체 시나리오를 주셨고 거기에 대한 제 생각을 물었어요. 그리고 수어를 어떤 몸짓으로라도 좋으니 준비해달라고 하셨어요. 수어 연기는 감정을 넣어서도 해보고, 빼고도 해봤어요. 수어 연기의 경우 수어 사전 사이트를 찾아서 거기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조합해서 만들어 갔어요”라고 2차 오디션 후기를 전했다.
진대연과 연기 앙상블을 맞춰 봤던 3차 오디션을 거쳐 박유림은 합격 통보를 받았다.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촬영은 두 달 뒤 부산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즈음 대구에서 코로나19 대규모 확진 사태가 벌어지며 촬영지는 일본으로 변경됐다.
“국내에서 연습을 하면서 연락을 기다렸어요.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안되는건가’라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어요. 제 첫 영화인데 무산되면 너무 속상하잖아요.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10월부터 도쿄와 히로시마에서 촬영을 시작한다는 연락을 받고 뛸 듯이 기뻤죠”
박유림은 ‘드라이브 마이 카’ 촬영을 앞두고 전문 선생님의 지도 아래 수어를 배웠다. 일본에 도착해서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끊임없이 수어를 익혔다. 목표는 ‘수어를 외운다기보다는 몸에 익힌다’였다. 오디션장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준 극중 유나의 모습은 박유림이 의도한 ‘체화된 몸짓’이었다.
◆ 박유림이 경험한 하마구치표 디렉팅…’충동의 미학’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연기 디렉팅은 특별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연극 연출가 가후쿠가 추구하는 방식이 곧 하마구치의 방식이다. 배우들을 한데 모아 놓고 감정을 배제한 채 대사를 반복해서 읽게하게 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되게 특이하긴 하죠. 그런데 굉장히 특별해요. 저는 감독님의 스타일을 알고 간 거라 놀라진 않았어요. 1차 오디션 때도 제가 “가후쿠의 방식이 감독님 방식 아니에요?”라고 물었거든요. 저는 그 과정이 뭔가 실험하는 것 같았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 의문이 들지는 않았고 내내 흥미롭게 임했던 것 같아요. 동시에 내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연기할까. 내 모습은 어떻게 나올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계속해서 리딩을 했던 것 같아요.”
박유림이 말한 ‘실험’은 반복된 대본 리딩과 현장에서 나오는 즉흥 연기가 합쳐진 과정이다. 배우들의 연기합은 대체로 반복된 연습을 통해 이뤄진다. 이때 연습이라는 것은 대본에 쓰인 대사를 읊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전과 마찬가지로 호흡과 감정을 담는다. 하지만 하마구치의 방식은 감정을 배제한 채 대사를 반복해서 읽고, 연기는 실전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진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을 때랑 다르게 그 순간순간의 마음을 느끼는 게 좋았어요. 저는 그걸 ‘충동’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충동을 느끼고 행동하기까지의 과정이 재밌더라고요. 무엇보다 감독님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주셨어요. 전 그 안에서 감정을 느끼고, 행동을 했을 뿐이죠. 대본 리딩 때는 감정을 배제한 채 연습을 하다가 촬영장에서는 감정을 느끼며 연기를 하니 반갑고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촬영장 가는 길이 항상 설렜어요.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상상만으로도 너무 좋았거든요”
하마구치 감독은 대부분의 촬영을 대본 순서대로 찍었다.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박유림의 분량은 약 일주일에 걸쳐 촬영됐다. 배우가 현장에서 느낀 첫 감정을 중시하는 감독의 스타일로 인해 촬영 테이크도 많이 가지 않았다. 국내 촬영장에서 배우가 필수적으로 할 수 있는 현장 모니터링 과정은 없었다.
“모니터링은 카메라 감독님과 감독님만 하셨어요. 배우가 카메라에 나온 자기의 모습을 미리 확인하는 것을 안 좋아하신다고 하셨어요. 제가 어떻게 연기한 건지, 잘 하긴 한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참았어요. 부산영화제 상영 전에 에디터 시사로 봤는데 떨리고 무섭더라고요. 제 장면이 나올 때 몸이 굳고 긴장돼서 실눈 뜨고 봤던 기억이에요.”
박유림의 출연 분량은 길다고 할 수 없지만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가후쿠가 유나(박유림)와 재니스(소냐 위엔)의 스탠딩 연기를 보고 “무엇인가 일어났어”라고 말한 장면의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연출가의 쾌감을 불러일으킨 연기를 직접 한 배우도 ‘무언가’를 느꼈을까.
“다른 배우들은 모두 앉아있고, 저희 둘만 서서 연기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상대방이 어떻게 연기할지 모르니까 정말 집중해야 했어요. 감독님은 배우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촬영을 시작하는 걸 원치 않아서 무표정으로 있다가 액션 사인이 나면 표정을 지어요. 그때도 ‘충동’을 많이 일으켰던 것 같아요. 리딩을 워낙 많이 해서 불안함은 전혀 없었어요. 그것보다는 상대가 어떻게 연기할지에 대한 호기심이 컸죠”
박유림은 소냐 위엔과의 연기 앙상블에 대해 “상대가 어떤 것을 토스하면, 제가 그걸 받아서 또 토스하는 느낌이었어요. 기분 짜릿한 충동이었죠. 감독님은 ‘그때 그때 하고 싶은대로 연기하라’는 굵직한 디렉팅만 주셨어요. 그 디렉팅은 완전한 자유도, 완전한 통제도 아니지만 배우들을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 “궁금증, 호기심을 자극하는 배우 되고 싶어”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본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은 박유림에게 어떤 의미일까.
“저에게도 큰 위로가 된 대사예요. 모든 장면이 다 중요하고 소중했지만 그 대사만큼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실 분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나도 위로받았으니 가지고 있지 말고 감독님, 배우들, 스태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고생하셨어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죠. 관객 분들이 그 대사를 좋아해 주셔서 너무나 뿌듯해요”
이 연기를 마지막으로 모든 촬영을 마친 박유림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으로부터 “유나로 캐스팅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감독님이 왜 저를 캐스팅 했을까’, ‘나는 연기를 잘한 걸까’ 이런 질문에 답이 된 것 같았어요. 답이 하나하나 궁금했지만 내가 이 순간에 있는게 중요하니까 따로 묻지는 않았어요. 다만 저 스스로에게도 ‘잘했구나’라는 확신이 적었는데 그 말에서 답을 얻은 것 같았어요”
영화를 함께 만든 일원이자 관객으로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박유림은 “답이 없는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도 맞고, 네가 느낀 것도 맞다는 느낌을 줘요. 감독님의 영화는 그저 영화로 끝나는 게 아니라 관객의 인생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생각하게 하니까요. 또한 감독님이 뭔가를 명확하게 알려주려고 하기 보다는 개개인이 느끼도록 하는 힘이 있어요. 그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박유림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저를 궁금해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음…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녹아져 있는 인물로 관객과 만나고 싶어요. ‘드라이브 마이 카’가 그랬거든요. 제가 했던 고민과 감정들을 관객과 만나게 했다는 것을 처음 느껴봤어요. 또한 새로운 모습도 많이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아직은 저를 ‘궁금한 배우’로 여겨주셨으면 해요. 저도 아직 제가 궁금하더라고요. 끝없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연예뉴스 정은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