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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윌리엄 니컬슨 감독 서면 인터뷰
“사랑하려면 내게 정직해져야 한다”
“홀로 사는 인생 받아들여야 사랑도”
[*] 윌리엄 니컬슨 감독. *재판매 및 DB 금지
[*] 손정빈 에디터 = 만약 29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준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보여준 헌신이 사실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며 떠난다면 어떡해야 할까. 반대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사실은 가짜였다는 걸 29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면 어떡해야 할까. 바로 이 물음에 관한 이야기가 윌리엄 니컬슨(William Nicholson·74) 감독의 새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2월24일 개봉)에 담겼다.
그레이스(아네트 베닝)와 29년을 함께 산 에드워드(빌 나이)는 어느 날 아들 제이미(조쉬 오코너)와 아내 그레이스에게 차례로 선언한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집을 떠나겠다.’ 영화엔 이 일을 마주한 세 인물의 복잡한 마음이 얽히고설켜있다. 오랜 고뇌 끝에 집을 나온 에드워드는 홀로 남겨진 아내가 걱정되는 동시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사랑하며 살겠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그레이스는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에드워드와 다시 사랑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그건 불가능하다는 에드워드의 단호함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들 제이미는 사랑하는 부모님이 이별했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낀다.
니컬슨 감독은 이 가족의 이야기를 정곡을 찌르는 대사와 간결하고 담백한 연출로 능수능란하게 풀어낸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랑이라는 게 혹시 이 작품 제목처럼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 러닝 타임 내내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나서 영화가 끝난 뒤엔,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보게 한다.
영국에 있는 니컬슨 감독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그는 원래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2000),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2012), 배우 앤절리나 졸리가 연출한 ‘언브로큰'(2014),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의 ‘에베레스트'(2015) 등의 각본을 쓴 유명 시나리오 작가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후보로 두 차례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번 영화는 그의 두 번째 연출작. 니컬슨 감독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에 관한 얘기하며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자신과 타인에게 정직해져야 한다”고 했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건 출연진이다.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스타 배우 두 사람 아네트 베닝(Annette Bening)과 빌 나이(Bill Nighy)를 각각 그레이스와 에드워드 역에 캐스팅했고, 드라마 ‘더 크라운’ 시리즈와 영화 ‘신의 나라’ 등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젊은 배우 조쉬 오코너(Josh O’Connor)에게 에이미 역을 맡겼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는 영화가 아니라 에드워드의 결별 선언 후 세 사람이 어떤 심경 변화를 겪는지를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력이 특히나 더 중요했다.
니컬슨 감독은 나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억압된 전형적인 영국 남자를 연기하는 데 달인이라며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염두에 둔 배우였다”고 했다. 아네트 베닝에 대해선 “영화 속에서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허영심이 없는 배우”라며 “존경스러운 배우”라고 했다. 그리고 오코너는 보자마자 제이미의 적임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니컬슨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간을 압축하고 장소를 바꾸고 현실과는 다른 사건을 가미했지만, 니컬슨 감독은 마치 제이미처럼 오랜 세월 함께한 부모의 결혼 생활이 끝나는 걸 지켜봐야 했다고 한다. 제이미가 그레이스와 에드워드 사이를 오가며 두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니컬슨 감독 역시 부모의 행복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각자의 행복은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극 중 제이미가 겪는 과정은 내가 몇 십 년에 걸쳐 겪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극중 그레이스와 에드워즈가 사는 곳은 영국 남부 해안마을인 시포드(Seaford)다. 니컬슨 감독은 이 영화의 배경으로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아헤맸고, 시포드를 발견해 그곳에서 영화를 찍기로 했다. 시포드엔 바다와 함께 하얀색 절벽이 있다. 이 장소는 그레이스와 에드워드의 사랑이 끝났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절벽 바로 앞의 바다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은 계속 된다는 걸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절벽 위에 선 그레이스, 바다 앞에 선 에드워드를 통해 두 사람의 현재 상황을 대비해 보여주기도 한다. “절벽은 육지가 끝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서 있으면 저 멀리 수평선을 볼 수 있죠. 수평선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희망이에요.”
이 작품엔 사랑에 관한 인상적인 대사가 많다. 단순히 아름다운 비유를 한다거나 대단한 통찰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세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서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종종 위선적으로 행동하거나 때론 위악적인 언행을 보여주곤 한다는 걸 가감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후반부 에드워드의 새 연인인 안젤라가 그레이스에게 하는 말이다. ‘남편을 뺏어갔다’고 책망하는 그레이스에게 안젤라는 말한다. “불행한 사람 세 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명만 남은 것 같네요.” 니컬슨 감독은 “잔인한 말이지만 사실”이라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걸 감수해야만 할 때도 있다. 세 명 다 불행해지면 누구도 얻는 것이 없다. 또 잔인한 진실을 직설적으로 말해줌으로써 그레이스처럼 허상에 매달려있는 사람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고 했다.
니컬슨 감독은 사랑이 대단한 게 아니라고 했다. 너무 기대가 크기 때문에 사랑을 찾지 못 한다는 것이다. 그는 소울메이트를 기대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줄 사람을 찾으면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인생의 다음 단계를 함께할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 해도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렇게 한다면 상대방이 내게 주는 것이 크든 작든 기쁨을 느끼게 될 겁니다. 또 그 파트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매우 탄탄하고 깊이 있는 무언가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 상대방에 대한 신의, 습관, 그리고 함께 나눈 추억으로 이루어진 무엇이겠지요. 그게 바로 사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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