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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병 중 지난달 28일 별세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그래미’ 받아
백남준·이우환·방탄소년단 슈가 등 韓 아티스트와 인연도
영화 ‘남한산성’·애니 ‘안녕, 티라노’ 등 韓 작품도 참여
[*]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재훈 에디터 = 암투병 도중 지난달 28일 별세한 사카모토 류이치(71·坂本龍一)는 일본을 넘어 세계에서 인정 받은 영화음악 거장 겸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다. 테러·전쟁에 반대하고 환경 보호에 앞장선 활동가이기도 했다.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난 고인은 도쿄 예술 대학 재학 중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일렉트로닉 장르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출신이다. 1978년 ‘사우전드 나이브스(Thousand Knives)’를 발매하며 데뷔했고, 같은 해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결성에 참여했다.
1983년 팀이 해체된 이후 오히려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이 팀은 사카모토와 호소노 하루오미(76) 그리고 다카하시 유키히로(高橋幸宏·1952~2023)가 결성한 팀인데 지난 1월14일 다카하시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 사카모토는 당시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별다른 멘트 없이 회색 이미지를 올려 고인을 추모했다.
특히 사카모토는 영화음악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음악을 맡는 동시에 출연도 한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특히 영화 ‘마지막 황제'(1987)의 음악으로는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그래미상도 차지했다.
무엇보다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전향적인 자세로 전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3년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YCAM) 10주년 사업의 아티스틱 디렉터, 2014년 삿포로 국제예술제 2014의 게스트 디렉터로 활약했다.
2018년엔 서울에 완공된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에서 여러 사운드 설치 작품을 전시한 ‘라이프, 라이프(Life, Life)’ 전(展)을 선보였다. 재작년 3월엔 중국 베이징 무무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 ‘시잉 사운드 히어링 타임(Seeing Sound Hearing Time)’ 전을 열기도 했다.
[*] 사카모토 류이치 트위터 계정 메시지. 2023.04.02. (사진 = 트위터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2014년 7월 인두암에 걸린 사실이 알려졌지만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2015년 야마다 요지 감독의 작품 ‘어머니와 살면’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작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통해 영화음악 제작에 복귀했다. 2017년 봄에는 8년 만의 솔로 앨범 ‘async’를, 같은 해 말부터 ICC(도쿄)에서 신작의 설치 미술 ‘이스 유어 타임(IS YOUR TIME)’을 발표했다. 2019년엔 차이밍량 감독의 ‘유어 페이스(YOUR FACE)’로 제21회 타이베이 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그런 가운데 투병도 이어졌다. 작년 직장암으로 전이된 사실을 공개하고 수술을 받았다. 일본 문예지 ‘신초(新潮)’에 암투병 에세이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보게 될까’를 연재하기도 했다. 사카모토는 ‘신초’ 2월호에 실리는 이 에세이 최종회에서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민윤기)와 만난 일화를 적었다. 사카모토는 “음악에 진지한 청년”으로 슈가를 기억했다. 슈가는 열 두 살에 부모와 극장에서 봤던 영화 ‘마지막 황제’를 계기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재작년 6월에는 네덜란드 예술제에서 아티스트 다카타니 시로와 공동 제작한 신작 극장 작품 ‘타임(TIME)’을 발표했다. 지난해 7월엔 쉬안화(許鞍華·허안화) 감독의 작품 ‘제일로향’으로 홍콩금상장영화제 작곡상을 받았다.
사카모토는 평소 환경이나 평화 문제에 대한 관심도 컸다. 그에게 음악은 상처를 치유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2001년 9·11 테러,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 세계가 큰 아픔을 겪을 때마다 음악에 이를 녹이고 위로해왔다.
2017년 발매한 정규음반 ‘ASYNC’ 수록곡인 ‘안다타(andata)’는 동일본 대지진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침수된 피아노로 연주해 큰 여운을 전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부터 ‘ASYNC’를 발표하기까지 시간을 기록한 다큐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가 2018년 개봉했다. 2017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사카모토 콘서트 공연 실황 ‘류이치 사카모토: 에이싱크'(2018)도 그해 스크린에 걸리기도 했다.
[*]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15년엔 투병 가운데도 일본 전쟁법 반대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삼림 보전단체 ‘모어 트리스(more trees)’를 창설했다. 최근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해 재난 피해 지역 어린이들의 음악활동을 지원해왔다.
한국과도 인연이 많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과 교류했다. 특히 1984년 공개된 ‘올스타 비디오(All Star Video)’는 영상과 음악을 결합한 멀티미디어 작품으로, 두 사람의 협업작이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오른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2017)의 음악 감독도 맡았다. 2018년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국내 애니메이션 ‘안녕, 티라노: 영원히, 함께'(2019)도 맡았다.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의 영화 ‘분노'(2016) OST도 작업했다.
2011년 사카모토가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와 자동 연주되는 피아노가 서로 밀어(密語)를 속삭이듯 감각적으로 조화를 이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 등 몇 차례 내한공연을 열었다.
슈가 외에도 ‘오징어게임’ 정재일 음악감독,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유희열, 밴드 ‘못’ 멤버 겸 싱어송라이터 이이언 등 국내에서도 사카모토를 존경하는 뮤지션이 상당수 많다.
[*] 사카모토 류이치. 2022.11.2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photo@news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특히 작년 6월 유희열 ‘아주 사적인 밤’이 자신의 작품 ‘아쿠아(Aqua)’를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였을 때 유희열을 두둔했다. “두 곡의 유사성은 있지만, 제 작품 ‘아쿠아’를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법적 조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나의 악곡에 대한 그의 큰 존경심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을 냈다.
사카모토는 말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공개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디 익셉션’의 음악을 담당했다. 그해 12월엔 온라인 콘서트 ‘류이치 사카모토 : 플레잉 더 피아노 2022(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를 공개했다. 60분 남짓의 러닝타임의 이 온라인 공연은 실시간 스트리밍이 아니었다. 사카모토가 망설임 없이 “일본에서 가장 좋은 스튜디오”라고 장담하는 도쿄 시부야의 NHK 방송센터 509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몇 곡씩 정성들인 연주를 미리 영상으로 녹화했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편집했다. 오는 14일 이 온라인 콘서트 등의 내용이 담긴 다큐가 공개된다. 오는 6월 일본에서 개봉 예정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새 영화 ‘괴물’의 음악도 맡았다.
자신의 일흔한번째 생일이던 지난 1월17일엔 6년 만의 오리지널 앨범 ’12’를 공개했다. 사카모토가 계속되는 투병생활 속에서 일기를 쓰듯 제작한 음악의 스케치 중에서 12곡을 골라 한 장의 앨범으로 정리한 작품집이다. ‘20210310’ 등 각 곡의 제목은 곡을 제작한 날짜로 정했다. 다만 8번 트랙 ‘20220302’에만 ‘사라반드(sarabande)’가 부제로 붙었다. 사라반드는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고전무곡을 뜻한다.
피아노·신시사이저를 기반으로 한 ’12’ 속 음들은 물성을 갖춘 또 하나의 건축물이었다. 청자와 대등한 관계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고독함을 짓는 앰비언트 음악의 미학. 그건 창작자의 고뇌나 고통이 아닌 그 음악을 듣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고수의 독야청청(獨也靑靑)이 주는 묘수였다. 깨진 유리판 등 위에 큰 돌덩이를 올려 놓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과 맞닿는 정신이기도 하다. 사카모토와 절친한 이 화백이 이번 음반을 위해 드로잉한 작품이 ’12’ 커버로 사용됐다.
◎지오아미 코리아 realpaper7@1.234.219.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