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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일제강점기 영화인들의 육성 기록 담아
[*]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사진=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3.02.06. *재판매 및 DB 금지
[*] 1965년 4월, 영화잡지 ‘영화예술’을 창간한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영화예술’ 지면을 이용하여 한국영화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사의 재료가 될 만한 사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대신해 그 시대를 살았던 중요 영화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해 그것을 영화사의 재료로 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66년 안종화 선생의 사망이었다. 안종화 선생은 한국영화사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 ‘신극사이야기’(진문사, 1955)와 ‘한국영화측면비사’(춘추각, 1962)와 같은 초창기 연극, 영화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저작을 저술했다. 신파배우로 시작해 영화감독으로도 활약하며 한국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안종화의 죽음은 단지 자연인 한명의 죽음이 아니라, 기록되지 못한 영화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영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이자 토오키 영화 ‘춘향전’의 녹음을 완성시킨 한국영화기술계의 큰 어른 이필우, 초창기 여배우 중 한명인 복혜숙, 1920~30년대 변사제도를 증언해줄 수 있는 성동호, 한국영화사의 전설적인 인물 나운규의 생애와 영화 활동을 대변해줄 수 있는 윤봉춘, ‘아리랑’(1926) 이후 최고의 영화작품으로 꼽히는 ‘임자 없는 나룻배’(1932)의 연출자 이규환 등 10여명의 원로 영화인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기록은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 저작인 ‘한국영화전사’(삼애사, 1969)와 ‘한국영화인열전’(영화진흥공사, 1983) 등에 반영됐다.
2001년 이영일이 칠순의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자료는 그가 말년에 강의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한국예술연구소로 이관됐다. 이곳에서 이영일이 1960년대 후반 인터뷰한 초창기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문자로 풀어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도서출판 소도, 2003)이 출간됐다. 이 책은 2000년대 한국영화사 연구를 한 단계 발전시킨 중요한 자료로 활용됐는데, 이 무렵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굴한 일제강점기 영화들이 어떻게 제작됐으며, 어떠한 맥락에 위치하는지를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시켜 주었다.
얼마 전 KBS 다큐인사이트 제작팀과 1947~1950년 제작된 뉴스영화 ‘전진조선보’와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전진대한보’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KBS에 소장된 이 뉴스영화는 해방 직후부터 정부수립·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역사적 상황을 보여주며, 문자로 담아 내지 못하는 당시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 뉴스영화 제작에 참여한 촬영감독 이필우, 유장산, 이경순 등의 목소리가 담긴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을 다시금 펼쳐보았다. 미 정보부대인 502부대에서 촬영한 오키나와 전투 필름을 현상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현상과 편집, 녹음을 도와 ‘오키나와 소탕전’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제작했고, 자유영화사 이름으로 상영했다. 우리 영화인들의 영화제작 능력을 인정한 미군정청은 이들이 502부대의 에디터재를 이용해 뉴스를 제작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진조선보’가 공보처 영화과의 뉴스를 대신했다.
이러한 사정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이영일이 남긴 그 시절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들의 틈을 메우며 당시 상황을 보다 명확히 보여준다. 인터뷰를 마친 후, 새삼 나와 같은 영화사 연구자들이 보다 수월하게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이영일이라는 거목이 드리운 그늘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영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초창기 한국영화사 연구자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연구에 필요한 1차 자료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나마 지금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중심이 돼 각종 영화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하니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이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