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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영화 ‘다음 소희’서 경찰 오유진 역 맡아
2014년 ‘도희야’ 이후 정주리 감독 재회
“정주리가 고지식한 사람이라 좋더라”
정 감독과 동지애 느끼며 영화 만들어
또 경찰 연기 “직업 같은 뿐 다른 인물”
“버티며 사는 이들에게 위로 되길” 눈물
[*] 손정빈 에디터 = “정주리 감독은 고지식해요. 전 그런 사람이 좋아요. 게다가 영화를 너무 잘 만들잖아요.”
배우 배두나(44)에게 정주리 감독과 다시 만나 작업한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배두나는 9년 전 정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도희야’에 출연했다. 배두나는 당시에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이미 전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던 글로벌 스타였다. 그런 그가 무명 감독이 만든 작은 규모 작품에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화제가 됐다. 물론 배두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 ‘도희야’는 관객과 평단의 고른 호평을 이끌어냈고, 정 감독은 앞으로 필모그래피가 가장 기대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나서 9년, 배두나는 정 감독의 새 영화 ‘다음 소희’를 또 한 번 망설이지 않고 택했다. ‘도희야’를 하기로 했을 때, 배두나는 정 감독에게 “이 영화가 세상에 꼭 나왔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음 소희’를 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 묻자 배두나는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전 이 분(정주리 감독)의 영화를 너무 좋아해요.”
‘다음 소희’는 만만치 않은 영화다. 2017년 1월 전주 아중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된 이 작품은, 현장실습을 나갔던 학생이 콜센터 계약 해지 방어팀에서 일하며 온갖 부당 노동 행위에 시달리던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만 실제 사건을 극화했다. 배두나는 경찰 ‘오유진’을 연기했다. ‘소희’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수사하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 자살 사건으로 처리할 수 있던 일을 천천히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이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영화는 소희와 유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오류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고발에 그치지 않고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두루 돌아본다.
배두나는 원하는 영화·드라마를 고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배우다. 그런 그가 ‘도희야’에 이어 ‘다음 소희’까지 정 감독과 함께하는 건 아무래도 정 감독에게서 자신을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가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도(正道)를 걷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고 착한 사람이에요. 크리에이터로서는 고집이 있어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을 아주 날카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정주리 감독이 그런 사람이죠.” 배두나는 자신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하며 자신을 “옛날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배두나는 그런 정 감독에게 동지애를 느끼면서 ‘다음 소희’를 함께 만들어갔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배우들은 당연히 촬영만 하면 된다. 프리(pre) 프로덕션 과정이나 포스트(post) 프로덕션 과정엔 참여하지 않는다. 참여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배두나는 ‘다음 소희’가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상영되길 바라면서 ‘다음 소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봤다고 했다. 편집 중이었던 영화를 칸에 출품해보라고 정 감독에게 넌지시 말하기도 했단다(후반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칸에 출품한 ‘다음 소희’는 국제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됐다). “정 감독이 정말 믿음직 했어요. 타협 없이 본인이 원하는 걸 밀고나가는 모습이 멋지더라고요. 꺾이지 않는 마음이랄까요.(웃음) ‘도희야’ 때보다 강해졌더라고요.” 그러면서 배두나는 이런 농담을 던졌다. “전 이 정도로 타협을 안 하지는 않아요.”
최근 배두나는 유독 경찰 역할을 자주 맡고 있다. 드라마 ‘비밀의 숲’ 시리즈에서, 영화 ‘브로커’에서 그리고 ‘다음 소희’까지 최근 연기한 캐릭터 대부분이 경찰이었다. 근래 들어 경찰을 유독 반복해서 맡는 이유를 묻자 배두나는 “‘다음 소희’로 쐐기를 박으려고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직업이 경찰이라는 게 똑같을 뿐 모두 다른 인물이기 때문에 경찰을 자주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다”고 덧붙였다. “전 어릴 때부터 관찰자 역할, 그러니까 감독의 시선이 담긴 캐릭터를 자주 맡았어요. 그런 맥락에서 제가 이제 나이를 먹다보니까 제가 연기하는 인물의 직업이 경찰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전 싫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경찰 역을 피하지 않을 거예요.”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진 인터뷰였지만, ‘다음 소희’라는 제목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배두나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소희 같은 아이가 다음에는 나오지 않아야 하겠지만, 또 나올 수도 있고 지금도 소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있을 거라는 게 배두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소희와 같은 상황에 있는데 소희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버티고 있는 거잖아요. 버텨주는 게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버텨가는 분들에게 이 영화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
배두나는 요새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사색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걱정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들에 관해 얘기하는 작품에는 꼭 참여하려고 한다는 얘길 했다. “저는 지금 제 개인적인 걱정이 없어요. 그래서 다른 걱정을 하는 거죠. 아이들에 관한 것도 그런 겁니다. 아이들은 아직 우리보다 약하고 잘 모르잖아요. 더 보호해줘야죠. 제가 너무 나이브(naive)한가요. 그래도 그게 요즘 제가 하는 생각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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