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 ‘꼬꼬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1080호가 지화(火)철이 된 까닭은?

by Idol Univ

1080호는 왜 지화철이 되었나?

5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전하지 못한 목소리 : 지화(火)철 1080호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다시는 있어선 안 된 어느 날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지난 2003년 2월 18일 전융남 씨는 대구의 지하철에 올랐다. 그런데 그의 맞은편에 수상한 한 남자가 포착됐다. 이 남자는 한 손에 약수통을 들고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만지작대더니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 이는 바로 라이터.

수상한 남자는 지하철 안에서 라이터를 켜려고 했고 이를 본 전 씨는 그를 제지했다. 그런데 이들이 탄 1079호 열차가 대구 중앙로역에 들어서던 그 순간 수상한 남자의 바지에 불길이 치솟았다. 이에 전 씨를 비롯한 사람들은 다급하게 불을 껐다.

그러나 남자의 바지에서 번져 난 불은 순식간으로 옮겨 붙었다. 화재 발생 1분 만에 첫 신고 전화가 걸려왔지만 불이 번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에 승객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탈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탈출은 순조롭지 않았다. 지하철 승강장이 지하 3층에 있는 중앙로역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하 2층 개찰구를 지나 지하 1층 상가 건물들을 지나고 그렇게 지상으로 가야만 했던 것. 당시 지하 3층 승강장에만 2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비규환이 되어 탈출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반대편 승강장에 1080호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 화재 사고가 발생한 줄 모르는 1080호 승객들은 평온했다. 그런데 지하철이 승강장에 정차한 줄도 몰랐다. 이미 화재로 인해 발생한 연기가 시야를 가려 주변이 모두 깜깜했던 것.

이를 모르는 열차의 문이 열리고 열린 문으로 연기가 가득 몰려들었다. 열차는 승객 몇 명만 내려주고 급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열차는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 이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야 1079호 화재 사고를 알게 된 1080호 승객들. 그런데 이들은 대다수 열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빨리 열차가 이곳을 벗어나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불길이 1080호 열차로 옮겨 붙었고 이에 1080호도 아비규환의 상태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놀란 승객들의 신고 전화가 이어지고, 당시 20분 동안 150통이 넘는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이에 소방본부는 초비상. 대구 전역의 소방차와 구급차가 일제히 출동한 이 사건은 바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럼에도 구조를 위해 현장에 진입하는 소방대원들. 하지만 이들이 화재가 난 현장까지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기로 시야는 가려지고 화재로 인한 뜨거운 열기는 방화복을 입은 소방 대원들이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쓰러진 사람들을 옮기고 또 옮긴 대원들. 그리고 상황은 점차 더 악화됐다. 전동차가 있는 지하 3층은 방화복을 입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화염은 1시간 40분 동안 계속됐고, 본격적인 진화 작업은 화염이 걷힌 후에나 가능했다. 이에 지하 3층에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고 특히 전동차 안에는 사람들의 뼈만 남고 모두 타버린 상황이었다.

지하철의 특수성 탓에 누가 탔는지 몇 명이 탔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중앙로역에는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다니며 가족을 찾았다. 하지만 사건 발생 10시간이 지나도 가족의 생사 확인도 어려운 사람들이 다수였다.

아내와 딸과 연락이 닿지 않는 재영 씨는 무작정 대구로 와서 두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부상자, 사망자 명단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중앙로역 대구역 CCTV에서 아내와 딸을 포착했다. 손을 꼭 잡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던 것. 그리고 이들이 탄 것은 바로 1080호 열차였다.

재영 씨 같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지만 이들이 가족을 찾을 방법은 많지 않았다. 열차 안에 남은 것은 유골 일부분과 타다 남은 물건들 뿐이었고 특히 수많은 유해가 뒤엉켜 누가 가족인지 알 수 없었다. 이에 경찰 감식반과 국과수 법의학자들이 총동원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은 불에 타지 않을 가족들이 지니고 있었을 법한 소지품 목록을 적어 유해 발굴단에 전달했다. 이에 재영 씨는 딸이 걸고 있던 미아 방지 목걸이, 아내가 차고 있던 예물 시계를 적어냈다. 그리고 19살의 딸을 찾아 헤매던 한 엄마는 딸과의 이야기들이 담긴 딸들의 소지품을 적었다.

이에 엄마는 “딸이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엄마가 내 아이가 여기 죽었습니다 하고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반지 만들었던 곳에서 자료를 만들고 안경집에 가서 자료를 만들고 찾아봐주십시오 하는 게 너무 미안했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당시 지하철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당시 56세의 김대한. 그는 2년 전부터 시작된 건강 악화로 세상을 비관했다. 이에 혼자 죽기는 억울하니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장소를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 이 말도 안 되는 방화로 350명의 사상자를 만들고 그중 사망자만 192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이 사고로 발생한 전체 사망자의 74%가 전동차 1080호에서 나왔던 것. 그리고 처음 불이 났던 1079호에서는 사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1080호에 사망자가 집중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하철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컨트롤해야 할 컨트롤 타워 종합사령실에서는 이 사고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직원이 3명인데 어느 누구도 1079호의 화재 사고를 목격하지 못했던 것. 이에 1080호의 중앙로역 진입을 막지 못했다. 특히 종합사령실은 화재 1분 만에 울린 화재경보기와 경보 문구를 오작동이라 여기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079호의 화재 사실을 안 것은 화재 발생 3분 후, 당시 역무원이 놀라서 화재를 신고했다. 이 시각이 9시 55분. 그리고 그 시각 1080호는 중앙로역 이전 역인 대구역에 정차 중이었다.

사령실에서는 곧바로 1080호의 진입을 막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사령실은 전체 열차에 “중앙로역에 화재가 발생했으니 진입 시 조심히 운전해서 가라”라는 말만 남겼다.

이에 1080호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중앙로역에 진입했고, 승강장에 진입해서야 연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기관사는 무정차 통과가 가능했음에도 지령이 없었기에 중앙로역에 정차했다.

화재 발생 4분 후의 시각, 승객들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 때문에 그 자리에서 열차가 떠나기만 기다렸다. 기관사나 사령실은 승객들을 대피시켜야 했지만 대피 방송은 하지 않았고 열차 출발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5분, 그 사이 전기는 다 끊어지고 사령실과 교신도 안 되던 기관사는 뒤늦게 열차 출입문 개방 버튼을 눌렀지만 전기가 끊어진 상황에 문이 열릴 일은 없었다. 그대로 열차에 갇혀버린 승객들. 열차 안은 유독가스와 열기로 가득한 상황에 승객들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5 호칸에서는 승객들이 유리창을 깨서 몇 명이 탈출했고 4 호칸에는 마침 탑승했던 역무원이 수동으로 문을 열고 탈출을 도왔다. 하지만 대부분이 수동으로 문을 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기관사는 1 호칸의 출입문만 수동으로 열어주고 급히 탈출했다.

어디가 계단인지 출구인지 분간이 안 되고 숨쉬기도 어려운 상황에 전동차에서 탈출한 승객들도 중앙로역을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방화셔터에 가로막혀 쓰러진 사람들이 다수. 이에 검게 그으른 방화셔터에 수많은 손자국과 발자국이 찍힌 것이 포착됐다.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했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이 사고는 인재와 인재가 겹쳐 350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

더 충격적인 일은 계속됐다. 이후 지하철 공사 측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의혹이 드러났다. 당시 탈출에 성공한 1080호 기관사는 11시간 잠적했는데 이 시간 동안 지하철 공사의 간부들이 그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경위서를 쓰도록 하고 회의를 했던 것.

그리고 화재 다음날 군인 200명을 동원해 정상화를 위한 청소를 지시했다. 이에 군인들은 사고 현장의 잔해들을 쓸어 담고 물청소까지 했다. 유가족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 소중한 단서가 될 유품들이 모두 쓰레기 포대에 버려진 것.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 포대에서 실종자들의 유해와 소지품 150여 점이 발견됐다. 그런데 이 사고가 대형 참사가 될 수밖에 없던 진짜 원흉은 지하철 그 자체였다.

방화범이 뿌린 휘발유 2리터에 전동차 두 대가 모두 전소됐는데 이는 당시 지하철 안전기준의 문제였다. 지하철 설비 소재에 대한 세부 기준이 없고, 특히 화재 시 가장 치명적인 유독가스에 관련된 기준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 커버에 스펀지 재질로 만들어진 지하철 의자는 가장 불에 잘 탔다. 이에 정기적인 방염처리가 필수임에도 대구 지하철은 개통 이후 단 한 차례도 방염처리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엄격하지 못한 기준에 안일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값싼 지화철이었던 것.

이 사고로 사법처리가 된 이는 10명. 방화범과 1080호 기관사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불쏘시개 지화철을 만든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 돌아갔다.

사고 이후 유가족들은 한 전시회로 향했다. 이들이 간 곳은 희생자 유류품 전시회. 현장에서 발굴한 유류품을 사진을 찍어 전시한 이 전시회에서 유가족들은 가족들의 유품을 찾았고 이를 토대로 가족들의 유해를 찾게 된 것.

딸이 살아있기만 바랐던 한 어머니는 보는 순간 내 아이의 물건임을 알고 주저앉았고, 딸과 아내를 잃은 남편은 탈출 의지를 잃고 아이만 보호하려 했던 아내의 마지막 흔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고통은 유가족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생존자들도 일상으로 회복 자체가 힘들었다. 생존자들은 사고 후유증으로 고통받았고 또한 본인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올해 19주기를 맞은 대구 지하철 참사. 사고 직후 내 일처럼 가슴 아파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이제 그만 잊으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중한 이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딸의 결혼 선물로 가장 소중한 선물을 하기 위해 25년간 딸의 목소리를 테이프에 담았던 한 아버지는 “목소리를 이제 나 혼자 듣잖아요. 고맙게 반갑게 들어야 할 딸은 가고 없고 나 혼자 듣는다”라며 가슴 아파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는 유족들이 잊는 날이 오더라도 꼭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 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던 것. 지하철 설비 소재는 모두 불연재나 극난연재로 교체되었고 화재대비 매뉴얼도 마련됐다. 또한 승강장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비상정지시킬 수 있는 버튼이 생겨났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전이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인 셈으로 우리 모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대구 지하철 참사. 가슴 아픈 참사에도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추모비나 추모 공원은 없다. 사실 당시 성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한 공원이 마련됐으나 그곳에는 시민 안전 테마파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추모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훗날 명칭 변경을 약속했으나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추모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들이 남긴 유산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남은 이로서 그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옮은 방법은 무엇 일지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연예뉴스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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