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21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43 지옥의 문 –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라는 부제로 군함도로 끌려갔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전했다.
1943년 1월 전북 익산의 열다섯 살 최장섭 군. 모범생이었던 장섭 군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같은 시기 전국 각지에서 장섭 군 또래들이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됐다. 어릴수록 좋고 많을수록 좋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손에 이끌려 갔던 것.
그리고 소년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따라가지 않으면 배급을 끊고 가족들을 해하겠다고 했던 것. 이에 소년들은 가족들을 위해 부모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납치되어 간 곳은 바로 일본의 하시마섬. 좋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 곳은 야구장 두 개 넓이의 섬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반기는 것은 영광의 문이라고 쓰인 것이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 소년들 눈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고층의 아파트와 병원, 학교, 극장 등 없는 것이 없었고 그 작은 섬에 도쿄의 9배 이상의 인구들이 모여 살았다.
조선 노동자들은 그곳에 위치한 9층짜리 아파트로 향했다. 하지만 이들의 숙소는 아파트의 가장 아래 반지하층. 특히 방 한 칸을 4, 50명이 함께 생활해야 했는데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인 노동자는 중간층, 관리자는 로열층, 철저하게 신분에 따라 아파트 층이 나뉘었다.
다음 날 조선인 노동자들은 탄광의 갱도 가장 끝부분인 막장으로 향했다. 좁디좁은 탄광에서 일하려면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필요했고, 이에 일본은 조선의 소년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군함을 닮은 군함도였다.
군함도의 탄광을 운영한 곳은 일본의 대기업 미쓰비시.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린 군함도의 석탄, 미쓰비시가 한 해에 캐는 석탄만 41만 톤에 달했고 이는 조선인들의 노동자들이 나서서 캐야 했다.
특히 막장은 높은 온도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바닷물 때문에 땀은 비 오듯 떨어지고 살은 짓물렀다. 그리고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군함도에서 조선인 122명 사망했는데 사인은 폭발사, 압사, 질식사, 익사 등이었다.
가축들이 먹는 콩깻묵으로 만든 주먹밥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인간다운 대우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폭력의 피해까지 입어야 했다. 인격이라고는 없던 군함도에서 나갈 방법은 단 하나 다리를 자르는 것이었다. 쓸모가 없어져야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현실에 어떤 이들은 일부러 석탄 수레에 다리를 집어넣기도 했다고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군함도의 출입구는 사실 영광의 문이 아닌 지옥의 문이었고, 군함도는 바로 지옥의 섬이었던 것.
당시 일손이 부족했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인권은 무시하고 급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군함도의 생활. 그러던 중 드디어 해방을 맞았고 조선인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설렘에 잠을 설쳤다. 하지만 배를 내어주지 않고 해방 2주가 지난 어느 날 배 한 척이 도착해 조선인들을 태웠다.
그런데 이들이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원폭 피해를 입은 나가사키. 일본인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빗자루와 삽을 들려줬다. 그곳의 복구 작업을 하라는 것.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한 달도 안 된 곳에 보호장비 없이 조선인을 데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3개월 후 드디어 통통배 3척을 내어주었고, 이를 타고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풍이 조선인들을 덮쳤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또 희생당했다.
고생 끝에 장섭 군은 무사히 귀국을 했다. 무려 3년 만의 귀국이었다. 고향 집에 도착하자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섭 군은 아버지의 오른손을 보고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오른손 손가락 네 개가 잘려 나갔던 것.
사실 장섭 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군함도에 강제 징용을 떠났던 그 시기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고, 일하던 중 손가락이 잘려 나가 평생 지었던 농사를 더는 못 지을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일본의 강제 동원 조선인은 무려 782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이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사할린, 남태평양, 동남아까지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지난 2015년 일본은 군함도가 자랑스러운 산업화의 유산이라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거세게 반발했다. 유네스코 또한 “군함도의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 강제노역의 역사를 숨기지 마라”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일본 대표는 알겠다고 수락했고,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강제 노역을 인정했다. 이 약속을 믿은 유네스코는 군함도를 세계 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그런데 일본의 약속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 일본은 자신들이 했던 말은 강제노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로 군함도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일본은 군함도를 소개하는 안내서를 통해 “누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가, 군함도는 지옥 섬이 아니다. 강제 노역 강제 동원 없었다. 군함도는 의식주를 함께한 탄광 커뮤니티, 하나의 가족처럼 살았다”라며 우리가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군함도 피해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섰다. 최장섭 군, 아니 이제 할아버지가 된 최장섭 할아버지는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자서 록을 통해 군함도에서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지난 2018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다시는 우리 후대 자손에게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역사는 옳게 써야 한다. 오직 눈물로써 우리 후손들에게 바라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이에 그의 아들 또한 군함도의 진실에 대해 “일부가 알아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국민이 다 알아야 한다”라며 “다시는 치욕스러운 일이 없게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최근 일본 정부는 사도 광산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하겠다고 밝혔다. 사도 광산 또한 군함도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고, 일본은 역시 강제 노역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한일 합병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고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조선인들을 동원한 것은 합법이다”라고 진실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실은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역사는 거짓말을 못 하기 때문에.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이야기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송영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나는 아버지가 두 분 계신다. 친아버지와 새아버지가 계시는데 새아버지는 장섭 할아버지와 동갑이고 일본에 강제 징용을 당하셨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장섭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에 강제 징용을 당하고,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사셨다. 이후 차별과 서러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 생각이 났다”라며 “내가 삶에 치여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망향 동산에 묻혀 계시는데 찾아뵙고 이 이야기를 꼭 알리겠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연예뉴스 정은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