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 ‘꼬꼬무’ 안학수 하사, 베트남전 참전 후 실종…’전쟁 포로’ 진실 알았으나 침묵한 정부, 왜?

by Idol Univ

꼬꼬무

북으로 간 안 하사, 그 진실은?

31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알라딘 램프와 땅콩’이라는 부제로 베트남전 참전 후 실종된 안학수 하사의 그날을 조명했다.

1966년 9월 16일, 이날은 오 형제 중 둘째 아들인 학수가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는 2년간의 파병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 이에 교장 선생님인 학수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서울에 있는 학수의 외갓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오기로 한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국방부에서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며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돌아오지 않은 채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동생 용수는 문방구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듣게 된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접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형 학수가 남한이 싫어 북으로 월북을 했다는 대남 방송을 듣게 된 것. 이에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집안이 잠잠해질 새도 없이 누군가가 용수와 가족들에게 들이닥쳤다. 군대 내의 중앙정보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보안사는 학수의 가족들을 끌고 가 취조를 하기 시작했다. 월북한 학수 때문에 가족들이 간첩 활동을 할 수도 있다며 그들을 의심했던 것.

이에 보안사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용수와 가족들을 데려가 취조를 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겨우 16살인 아이에게 어른들이 돌림빵을 하고, 물고문을 했으며 권총 방아쇠를 당기며 겁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 끔찍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안학수가 월북을 했으니 당신들은 잠재적인 간첩이다. 빨갱이 가족이다”라는 것.

금세 이 사실이 알려지고 용수는 학교에서 이유 없는 폭력을 당해야 했으며, 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잘리는 것은 물론이고 관사에서도 쫓겨나 가족들은 달동네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그리고 보안사의 사찰은 1993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지속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 때까지 가족들은 안 하사의 월북 납득하지 못했다. 특히 부모님들은 아들 학수를 믿으며 절대 그가 그럴 리가 없다며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2001년 차례대로 아들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전 아들 용수 씨에게 유품과 유언을 전했다. 그가 남긴 유품은 그동안 학수 씨에 관해 모은 자료들이었다. 또한 그는 “억울해서 눈을 못 감겠다. 너라도 꼭 해결해라”라고 용수 씨에게 유언을 남겼다. 이에 용수 씨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국방부와 청와대에 계속 민원을 넣고 신문사와 방송사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렇게 8년이 흐르고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외교부 출입 에디터가 기밀 해제된 외무부 문서가 있는데 그에게 꼭 확인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는 것.

용수 씨가 확인한 기밀문서는 외무부가 국방부, 청와대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바로 용수 씨의 형 안학수 하사가 전쟁 포로라는 것이었다. 귀국 일주일 전 부대 일로 출장을 나갔다가 실종된 그는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학수 씨는 월북이 아닌 강제 납북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었고 이 모든 사실은 국가가 알고 있어 충격을 자아냈다.

또한 1976년 한 귀순자의 증언으로 안학수는 북한을 탈출하려다 총살당했음이 밝혀졌고, 이 사실 또한 정부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학수 씨가 사망한 후 17년간 가족들을 사찰하며 괴롭혔던 것.

그렇다면 정부는 왜 그가 전행 포로가 된 사실을 숨겼던 것일까?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 후 국군 포로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선전했던 정부는 뒤늦게 돌아온 전쟁 포로 유종철 씨에게 싸늘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반대가 심했지만 파병을 강행했던 정부의 목적은 바로 돈이었다.

한국군을 보내주면 경제 발전을 위한 돈을 대주겠다는 미국의 제안에 8년 반 동안 32만 명을 파병했고, 이에 벌어들인 돈은 무려 50억 달러였다. 이 돈은 50년간 수출을 해서 벌어들이는 규모의 돈이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미 국무부로 보낸 전문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 5만여 명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알라딘의 램프로 생각한다”라는 구절이 드러나 충격을 안겼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을 볼모로 잡고 미국에 소원만 빌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전투 부대에 국한되던 파병을 점차 확대하며 민간인까지 파병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희생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던 것이었다. 당시 파병 일병의 하루 임금은 미군의 4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에 나아가 태국, 필리핀군의 임금에 비해서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 미국 대통령 특보는 미 대통령에게 “미국이 한국군에 지급하는 물자와 자금의 총비용은 비슷한 숫자의 미군에 투입하는 양에 비하면 땅콩값 정도다”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던 선택이라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청년들이 실종되어 포로로 잡혀갔다면 어떻게든 구해내야 하고, 그것이 안 되더라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 국가의 도리일 텐데 우리 정부는 포로를 구하기는커녕 전쟁 포로는 단 한 명도 없다며 선언해버렸던 것이다.

특히 당시 실종된 병사는 실종 열흘만에 시신 확인도 없이 전사 처리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1년 만에 전쟁 포로였다가 풀려난 유 일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은 그의 유해라며 국내로 보내 국립묘지에 안장까지 했던 것. 하지만 1년 후 그는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사연도 놀라웠다. 우리 정부의 요구가 아닌 베트콩의 포로 교환 요구에 의해 그가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그가 돌아온 후 그를 부활로 처리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던 국가는 끝까지 우스운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사과도 없었던 정부. 그들은 국민들의 원망과 비난을 피하고자 모든 것을 덮고 지우려고만 애썼던 것이다.

그에 반해 절대 병사를 포기하지 않는 미국. 미국은 전쟁 포로를 담당하는 전담 부서도 있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토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전쟁에 나간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수십 년이 흘러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2년 전에는 최신 해저 로봇을 이용해 베트남의 바다에서 미군 병사의 시신을 찾아내기도 했다. 53년 만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국가를 위해서 나간 사람이니 돌아올 때까지 지켜보고 찾아주는 것이 국가가 자국민에게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 텐데 우리나라는 그 예의조차 지키지 않고 있던 것.

학수 씨의 동생 용수 씨는 확보한 모든 증거들을 가지고 민원을 제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답은 “안학수 하사는 월북자가 아니라 북으로 끌려간 우리 군국이다”라는 것. 이 답은 그가 베트남에서 실종된 지 43년 만의 응답이었다.

안학수 하사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 후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우리 청년은 모두 17명. 대한민국은 그 청년들의 어머니로서 아들들이 집에 돌아오는 그날까지 아들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국, 어머니의 나라가 해야 할 도리이다. 

(연예뉴스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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