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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빈 에디터 = 3월 4주차 개봉 영화 및 최신 영화에 대한 간단평을 300자 분량으로 정리했다.
◆윌 스미스에게 박수를…킹 리차드
‘킹 리차드’는 테니스계 살아있는 전설이자 여성 스포츠인의 아이콘인 비너스·세리나 윌리엄스 자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매를 키운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에 관한 얘기다. 이 영화는 스포츠 성공 신화를 다룬 평범한 작품과는 다른 길을 간다. 자식을 성공시키기 위해 헌신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오만과 독선을 담아낸다. 또 인종·성(性) 차별 문제를 짚어내기도 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기 위해 집착에 가까운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기도 한다. 어쨌든 ‘킹 리차드’는 윌 스미스의 영화다. 스미스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올해 아카데미의 남우주연 부문 오스카는 그의 몫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웃으면서 울게 된다…벨파스트
‘벨파스트’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한다. 웃으면서도 인상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뭔지 알려준달까. 이 영화는 격렬한 종교 분쟁이 있던 1969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소년 버디의 이야기다. 문제는 이런 거다. 버디의 9살 인생은 종교 분쟁 따위와 관련 없이 천진난만하지만, 군대가 동원될 정도로 악화하기만 하는 이 종교 분쟁은 반대로 버디의 천진난만함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디는 벨파스트를 떠나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사실 그건 관객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왜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며, 버디는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하는 걸까. 따뜻하면서도 냉혹한 영화가 바로 ‘벨파스트’다.
◆이건 우리도 사는 아파트입니다…고양이들의 아파트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두 개 장면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 단지와 아파트 내부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는 모습이다. 어쩌면 ‘제 집 드나들 듯’이라는 표현도 틀린 걸 수도 있다. 그 아파트는 고양이들의 아파트이기도 했으니까. 거긴 사람들의 집이기도 했고, 고양이들의 집이기도 했다. 다른 장면은 고양이들을 ‘고양이’로 뭉뚱그리는 게 아니라 각각 이름을 붙여 불러주는 이들의 모습이다. 이 고양이 호명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데, 이는 아마도 고양이를 우리와 공존하는 존재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게다. 정재은 감독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 땅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고양이의 것이기도 하다.’
◆눈 돌리지마, 이게 여성의 현실이야…레벤느망
오드리 디완 감독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아주 날카롭게 베면서 전진한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레벤느망’은 너무 아프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영화를 멈추고 싶을 정도다. 임신 중지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의 카메라는 주인공 ‘안'(안나마리아 바르토로메이)에게 찰싹 달라붙어 그가 겪는 고통을 관객이 목격하게 한다. 마치 절대 눈을 돌려선 안 된다고 호통을 치는 것 같다. 이게 여성이 맞닥뜨린 현실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비극적인 영화 한 편이 완성된다는 건 현실 세계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봉준호 감독이었다.
◆최민식이 나오긴 하지만…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배우 최민식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영화다. 최민식이라는 명배우가 가진 힘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그가 화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밋밋하기만 한 영화에 굴곡이 생기고, 허술한 스토리에 그럴싸한 변명이 생겨난다.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그렇다. 이렇듯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최민식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이지만, 그걸 빼고 나면 약점이 너무 많다. 그 중 딱 한 가지만 짚어보고 싶다. 새로움도 날카로움도 없이 착하기만 한 영화는 이젠 올드한 게 돼버린 시대라고.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영웅이 되다…더 배트맨
시종일관 어둡고 축축하다. 창백하게 질려있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더 배트맨’은 그림자의 영화다. 그리고 복수의 영화다. ‘더 배트맨’은 아마도 지금껏 나온 배트맨 영화 중 가장 우울한 작품일 것이다.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의 경쾌함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실과 좌절이 안긴 깊은 트라우마에서 탄생한 자경단이 어떻게 행복한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겠나.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잘 잊히지 않을 이미지를 선사함과 동시에 그 이미지로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린 이제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저 악당을 해치우는 배트맨이 아니라 절망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 세계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싸우는 남자를 알게 됐다.
◆몰락의 기쁨…나이트메어 앨리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파괴된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몰락에 매혹된 남자의 이야기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욕망에 파묻힌 것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나락으로 떨어지기 위해 산화한 것에 관한 얘기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급전직하 하는 비극적 삶이라는 건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니 어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나. 그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다. 괴물도 유령도 없다. 크리처물도 공포물도 아니다. 그의 영화를 두고 흔히 표현하는 동화 같은 얘기는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트메어 앨리’는 델 토로의 영화다. 어둡고 음침하고 불길한데, 이토록 화려하고 매혹적이니까. 추하면서도 아름답고, 비통하면서 기쁘기까지 하다.
◆침묵의 걸작…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는 현재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일본 감독이다. 그는 올해 ‘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현재 일본 영화계 최전선에 있는 예술가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번에 개봉하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챙겨봐야 한다. 이 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기만 하다. 하지만 러닝 타임 3시간을 다 견디고 나면 눈으로 보지 못한 화염을 분명 느낄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마구치는 오래 전 딸을 잃고 이젠 아내마저 떠나보낸 한 남자의 침묵 속에서 그 길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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